고단했던 50년, 이제는 나를 위해 살아도 되는 이유
고단했던 50년, 이제는 나를 위해 살아도 되는 이유
메타 설명: 자녀와 부모, 회사 사이에서 정작 자신을 뒤로 미뤄온 오십의 시간. 장자와 논어, 불교의 시선을 빌려 '이제는 나를 위해 살아도 된다'는 말의 근거를 찾아본다. 추천 태그: 장자, 논어, 불교, 중년, 자기위로
오십을 넘기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. "나는 지금까지 누구를 위해 살았나." 자녀 교육, 부모 부양, 직장에서의 자리 지키기. 그 어느 것도 가볍지 않았고, 대부분은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. 그렇게 살다 보니 정작 나 자신은 늘 순번에서 밀려 있었다.
이제 조금 다르게 살아도 된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 한편이 불편해진다. 이기적인 건 아닐까, 아직 이르지 않을까. 동양의 오래된 지혜들은 이 질문에 꽤 명확한 답을 준다.
장자: 쓸모없음의 쓸모
장자에는 크고 굽은 나무 이야기가 나온다. 목수들이 쓸모없다고 지나쳐버린 덕분에 그 나무는 베이지 않고 오래 살아남아 넓은 그늘을 드리웠다는 내용이다.
이 이야기의 핵심은 쓸모의 기준이 누구의 것이냐에 있다. 남이 정한 쓸모에 맞추느라 소진되는 삶과, 그 기준에서 벗어나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삶은 다르다. 오십 이후, 회사나 사회가 매기던 '쓸모'의 등급에서 조금 벗어나는 일은 실패가 아니다. 오히려 그때부터 자기 삶의 그늘을 만들 수 있게 된다.
논어: 오십에 이르러야 알게 되는 것
공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이별로 도달한 지점을 이야기했다. 마흔에는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(불혹), 쉰에는 하늘이 준 뜻을 알게 되었다(지천명)는 대목이 그것이다.
여기서 '지천명'은 흔히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읽히지만, 다르게 볼 수도 있다. 무엇이 내 몫이고 무엇이 내 몫이 아닌지를 구분하게 되는 나이라는 뜻이다. 자녀의 인생은 자녀의 몫이고, 회사의 성과는 회사의 몫이다. 그 구분이 서면 짊어지지 않아도 될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.
불교: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것
불교에서 고통의 뿌리로 보는 것은 집착이다. 여기서 집착은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라, 그것이 반드시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붙잡는 마음이다.
오십 이후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들을 떠올려보면 대부분 이 범주에 든다. 자녀가 내가 그렸던 길을 가지 않는 것, 후배가 내 자리를 대신하는 것,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것. 이 중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.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붙잡고 있으면 고통만 남는다는 것이 불교의 오래된 통찰이다.
'나를 위해 산다'는 말의 진짜 의미
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지점이 있다. 나를 위해 산다는 것은 가족을 저버리거나 책임을 던지는 일이 아니다.
- 내 몸의 신호를 무시하지 않는 것
- 하고 싶었던 일을 '언젠가'로 미루지 않는 것
- 나를 소모시키는 관계에 억지로 나가지 않는 것
- 미안함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을 갖는 것
이 정도다. 대단한 결단이 아니라, 그동안 순번에서 밀렸던 자신을 앞줄로 조금 당겨오는 일에 가깝다.
오늘 해볼 수 있는 것
거창한 계획 대신 작은 것부터 시작해보자.
- 이번 주에 나만을 위한 두 시간을 달력에 먼저 적어둔다
- 마음이 불편했던 약속 하나를 정중히 미룬다
- 늘 미뤄왔던 병원 검진 날짜를 잡는다
마무리하며
여기까지 걸어온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애썼다. 남은 시간은 조금 덜 짊어지고 걸어도 괜찮다. 그것은 이기심이 아니라, 오랜 시간을 견뎌낸 사람이 스스로에게 건네는 정당한 몫이다.